경성 제국대학은 일제강점기 조선 엘리트의 양면성과 식민지 교육의 모순을 가장 선명히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이 글에서 그 역사적 함의를 분석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은 단순한 식민지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 제국이 장기적인 전략 하에 체계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일본 제국은 단순히 경제적 자원 수탈이나 군사적 점령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의 정신과 사고까지 통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교육을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활용했으며, 그 중심에 바로 경성 제국대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경성 제국대학은 1924년 일본 정부가 설립한 고등 교육기관으로, 조선 내에서 유일하게 ‘제국대학’의 지위를 부여받은 학교였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에도 일본과 동일한 수준의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그 실질적인 목적은 철저한 이데올로기 통제와 엘리트 선별 및 관리에 있었다. 일본은 이 대학을 통해 조선 엘리트를 양성하고, 그들을 제국의 충성스러운 관리자이자 지배 도구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경성 제국대학에 입학한 조선인 학생들은 단순히 ‘제국의 수혜자’로만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이 처한 모순된 현실을 자각하며, 제국의 학문을 배워 체제에 적응하는 동시에 조선인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이처럼 경성 제국대학은 조선 엘리트에게 사회적 상승의 통로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제국에 순응해야만 하는 내적 갈등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경성 제국대학을 통해 형성된 조선 엘리트의 양면성을 분석하고, 그 역사적 함의를 고찰한다.
경성 제국대학의 설립 목적과 이데올로기적 기능
경성 제국대학은 일본 본토의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 등에 이어 조선에 설치된 제국대학이다. 일본은 ‘동화주의’를 표방하며 조선인을 일본인처럼 만들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교육을 핵심 전략으로 삼았다.
당시 조선에는 이미 경성의학전문학교, 법관양성소 등이 있었지만, 일본은 이보다 상위 개념의 교육기관을 필요로 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일본 제국의 질서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 일본은 제국대학 시스템을 도입해 조선의 엘리트를 선별·양성하려 했다.
하지만 실제로 경성 제국대학은 철저한 차별 속에서 운영되었다. 조선인 학생은 입학 자체가 매우 어려웠고, 입학 후에도 언어, 생활, 진로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인과의 격차를 경험해야 했다. 이 대학의 주요 학부였던 법문학부와 의학부는 특히 조선 지배에 필수적인 인력을 양성하는 데 집중되었다.
조선 엘리트의 ‘상승’과 내면의 균열
경성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들은 식민지 사회에서 엘리트로 인정받으며, 관료나 교사, 언론인, 의료인 등 사회적 영향력이 큰 직업을 차지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은 극소수였기 때문에, 이들은 곧 조선 사회의 상층부를 형성했다.
그러나 그 상승의 이면에는 정체성의 균열이 존재했다. 이들은 일본어로 수업을 듣고, 일본 교과서를 학습하며, 일본 학문의 틀 속에서 사고하도록 교육받았다. 조선어는 교내에서 거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부 학생들은 일본 제국에 동화되어 스스로를 ‘제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데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또 다른 일부는 점점 더 식민 지배의 모순을 자각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훗날 독립운동가나 저항 지식인으로 활동한 일부 인물들도 경성 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이들은 식민 체제 속에서 배운 학문과 언어를 오히려 저항의 무기로 삼았다. 경성 제국대학은 단지 순응적 지식인을 길러낸 공간만은 아니었으며, 다양한 사유의 가능성을 품은 복합적인 공간이었다.
해방 이후의 엘리트: 협력자 vs 창조자
1945년 해방 이후, 경성 제국대학 출신자들은 새로운 한국 사회의 재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남한에서는 이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서 관료, 학자, 언론인 등으로 중용되었고, 북한에서도 일부는 기술관료로 활동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식민지 시절 일본에 협력한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해방 직후부터 경성 제국대학 출신 인사들에 대한 ‘친일 청산’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었으며, 일부는 이에 따라 공직에서 배제되거나 사회적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을 단순히 ‘협력자’나 ‘배신자’라는 시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당시의 조선 엘리트들은 식민 지배라는 비정상적인 조건 속에서 선택지를 강요받았으며, 그 안에서 생존과 정체성 사이의 균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또한 이들 중 일부는 이후 대한민국의 교육, 법률, 언론, 의학 분야를 개척하는 데 기여하며 사회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결론: 경성 제국대학이라는 역사적 렌즈
경성 제국대학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다. 그것은 제국이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사고를 통제하고, 엘리트를 길들이며, 체제를 재생산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렌즈다. 동시에 조선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그 안에서 자신만의 정체성과 목적을 형성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이 제국대학의 역사를 마주하면서, 당시 조선 엘리트가 처했던 현실을 단순한 흑백 논리로 재단하기보다는, 그들이 직면한 모순과 갈등, 그리고 선택의 무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성 제국대학은 지금도 한국 사회의 지식 체계와 엘리트 구조에 깊은 영향을 미친 유산이며, 그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식 구조를 성찰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